클레멘스 포시

映畵, 영상 2009. 10. 18. 00:45





- 요즘 꽂힌? 프랑스 여배우, 클레멘스 포시.
<해리포터와 불의 잔>에서 플뢰르 델라쿠르로 출현했던..
원래 타고난 아름다움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 아름다움을 꾸밈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알아서 매력있는 아가씨이다.
그야말로 프랑스의 여인다운 느낌!!







야상점퍼, 청바지에 금색 힐 ㅋㅋ 이런 아무런 신경안쓴듯한 무심한 패션이 너무 좋다는 ^^;;;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하고 각진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고집이 센 듯한 인상인데,
웃으면 이렇게 토끼같이 귀여워지는 게 또 이 여인의 매력 ㅋㅋ


해리포터 출연진들과..
홀로 파리지앵의 느낌 마구 날려주시는 클레멘스양 ㅎ

역시 사람은 키크고 마르고 하얘야하는건가 -_-;;;;;;;;;!!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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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대통령 서거에 대한 단상

信, 순간 2009. 8. 25. 19:34

 


- 8월 18일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이후부터 공부가 도통 손에 잡히지 않아
고시생 신분임에도 과감히(?) 하루를 버리고 23일, 국회의사당과 서울광장에 다녀왔다.
나는 사실 DJ의 시대를 살았던 연배도 아니고,
호남 출신도 아니며,
그를 특별히 지지했던 편도 아니었지만,
게다가 노무현 전대통령 때와는 달리 그의 서거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거 소식을 접하는 순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동요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때보다도 더욱 그랬다. 
아마도 첫 번째로는 노무현에 이어 김대중이라는 민주개혁성향 지도자마저 잃었다는,
MB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진보적 한국인들이 느끼는 비슷한 상실감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로는 나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그야말로 온 몸으로 온전히 살아냈던 거인의 죽음에서
한국 현대사의 한 장이 막을 내리는 순간을 보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좀 더 곰곰히 생각해보자면, 후자 쪽의 감정이 더 큰 것 같다.
24년이란 그닥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으로(운 좋게도?) 한 장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을 보았다.
어느 정도 감정의 과잉과 비약이 섞인 다분히 주관적 견해이긴 하지만
한 동안 그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그 끝은 말 그대로의 '단절'을 의미하는 끝은 아니다. 
그가 죽었다고, 풍파 많은 한국 현대사가 함께 끝나버렸다는 그런 감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정치적, 사상적 유산들도 (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남아 다가오는 역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라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 온
하나의 거대한 시대정신은 일단의 막을 내렸다.
그것은 일제시대와 해방 공간을 거쳐 오늘날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져 온 
식민지 경험과 분단이라는 한국 사회의 특수한 조건이 만들어낸 한국 사회만의 
독특하고도 거대한 사류였다. 
개발독재와 그의 유지를 위한 반통일적 반공정책과 맞서 싸움으로써 한국 사회에 희망을 주었고,
6월 항쟁과 평화적인 정권교체, 남북회담을 이루어내며 어느 정도 결실도 맺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록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있게한 위대한 과거의 정신일런지는 몰라도
미래의 정신은 되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진보를 말하는 이들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보다 더 큰 가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록 MB 시대를 거치며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거꾸로 MB 시대의 부활을 막지 못한 것이 앞서 말한 시대정신의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과거의 정신이 되었다고 해서 그 시대적 가치를 평가절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기에
여운형, 조봉암, 김구, 장준하, 문익환 과 같은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그 정신을 지키다 죽어갔다.
그리고 DJ는 그러한 시대정신을 끝까지 지키다 죽어간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   

그러한 인물의 마지막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보낼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을 느꼈다.
노무현은 엄밀히 말하지면  그 시대의 정신보다는 '우리' 시대의 정신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가 내세웠던 지역주의 타파, 소통과 참여, 반권위주의는 DJ 시대의 가치라기보다는
포스트 DJ 시대의 가치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그의 죽음을 접했을 땐, '우리편'을 비열하게 뺏긴듯한 상실감과 분노에, 그리고 '우리편'을 
끝까지 보호해주지 못한 미안함에 눈물을 흘렸다. 다시는 그렇게 어이없이 '우리편'을 잃지말자는
다짐도 있었다. 
그에 비해 김대중 전대통령의 죽음은 한 시대를 이제는 정말 역사 속으로 보낸다는
감회와 아쉬움, 쓸쓸함이 좀 더 크다. 
그 시대를 피하지 않고 온전히 살아준 고인에 대한 깊은 존경과 
그의 큰 공헌으로 이루어낸 민주 사회를
그와는 달리 온전히 지켜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 대한 씁쓸한 반성이 교차한다.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는지 김대중 전대통령의 추모 풍경은 
겨우 석달 전인 노무현 대통령 때와는 많이 달랐다.
석달 전, 사람들은 거리에서 분노하고 있었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민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촛불을 들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와 같은 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담담히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잔디밭에 앉아 파란만장했던 고인의 생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그와 김정일 위원장이 포옹하는 그 역사적 장면을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이가 지긋하신 노신사들은 착찹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 문 채
그의 영결식 소식을 전하는 호외 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이 장면은 왠지 몰라도 나를 무척 슬프게 만들었다.)
노 대통령 때처럼 광장에는 커다란 흐느낌도, 분노의 구호도, 엄청난 인파도 없었지만
묘한 엄숙함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거대한 시대의 물결을 역사 속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광주와 금남로, 6월 항쟁, 민주주의, 통일 과 같은 것들이
그와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게 될까봐 두렵다.
얼마 전까진 촌스럽고 낡은 거대담론으로서 그저 넘어서야 할 것들로만 치부해버리기도 했었지만,
그와 같은, 이제는 낡은 것처럼 보이는 가치들을 위해서도 수많은 이들의 피와 희생이 있었고
그랬기에 지금의 우리도 이렇게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대부분 포스트 모던의 시대를 살아온 내가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인물인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리 없다.
이전에 비해서는 획기적인 친서민적 지도자였으나 시대적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에게서 솔솔 풍기던 권위주의적 냄새와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킴으로써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잉태시킨 그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
호남권과 영남권으로 대변되어 온 그의 시대의 골 깊은 지역주의 정치는
때론 그 역시 그저 그런 정치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죽음의 힘은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구나.
그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한국 사회와 역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자리가 이렇게나 큰 것이었음을
절감한다. 
진심으로 끝까지 가치를 배반하지 않고 사회를 위하여 헌신했던 '선생님'의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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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 2 : 최후의 결전

映畵, 영상 2009. 7. 13. 03:19




-  무려 작년 이맘때쯤 극장에서 1편을 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데, 본인의 게으름으로 이차저차 미루다가
이제서야 적벽 2를 보게 되었다. 
사실 작년에 본 적벽 1에서 다소 실망을 했었기 때문에 2에서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고,
오히려 그래서 나름 즐겁게 볼 수 있었던 듯. 
1편에서 젤 못마땅했었던 건 역시 제갈량의 캐릭터였는데
1편에 비해 2편에서 제갈량의 비중이 줄었고, 또 1편을 봐서 그랬는지 금성무의 어벙한 제갈량도 나름 적응이 된 탓에 1편만큼 제갈량의 캐릭터가 거슬리진 않았다는(오히려 몇몇 장면에선 큰 웃음 주셨다ㅎ)
작년 우연히 보게 된 씨네 21의 인터뷰에 따르면 오우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늘 그랬듯) 
제갈량과 주유 두 사나이간의 찐한 소통을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했었는데
제갈량과 주유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도도 바라볼 수 있다는게 꽤 참신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에서 그려진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와 같은 찐한 소통을 읽어낼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별로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1편에서는 그래도 그나마 화제가 되었던 가야금(거문고?) 연주씬이라도 있었지
2편에서는 그들의 찐한 소통을 표현했다고 할만한 그럴듯한 장면조차 거의 없다. ( 서로 목 내놓으라고 하는 장면이랑 마지막 주유가 제갈량에게 멍멍을 주는 장면 정도?? 이 장면들에서 주유와 제갈량은 거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본 채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 아마 감독은 두 남자의 이신전심 같은 걸 표현하려고 한 의도겠지만 - 오빠가 이걸 보고 ' 이 영화 은근 동성애 코든데'라고 해서 엄청 웃었다 ㅎㅎ;;;)
오히려 오우삼 감독식의 찐한 소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전형적인 관계는
조미와 어떤 이름 모를 배우가 분한 '먹보와 돼지' 였던 것 같다.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결정적으로 서로를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는 것이
꼭 영웅본색의 적룡과 주윤발의 관계같지 않은가? ㅎ
그에 비해 진정 찐한 소통을 보여주어야 할 주유와 제갈량은 그냥 삼국지 스토리 따라가기에도 너무 바쁘시다.
특히 주유가 진짜 너무 엄청 바빠보였는데 나중엔 자기 목숨도 챙겨야지 부인 목숨도 챙겨야지 
아기 목숨도 챙겨야지 불쌍해보일정도..
이미 잘 짜여진, 그리고 대중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맘대로 바꿀 수도 없는 
삼국지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짜다보니 이전처럼 감독의 의도를 맘껏 담아내기에는 좀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
그리고 삼국지의 뒷이야기를 생각해서 그런거겠지만 그 상황에 조조를 놔준다는 건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오빠와 나 둘 다 무심코 " 죽여 이 바보들아!!" 하고 소리질러버렸다는;;

 


- 비중은 작았지만 사실 적벽1, 2 통틀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캐릭터는 손권이었다.
원작에선 배나온 중년 아저씨로 나왔던 것 같은데 여튼 ;;; 
이 영화의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덜 채워진, 그것을 경험을 통해 점차 채워가는 과정을 
차분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라는 면에서 그랬던 것 같다.
양조위나 금성무와는 달리 장첸은 뭔가 딱히 고정된 이미지가 없는 배우다.
2046에서는 여자의 삶을 파멸시키는 나쁜 남자의 역을 맡기도 하고
해피투게더에서는 임자 있는 양조위에게 끌리는 순진한 알바생 역을 맡기도 하고
와호장룡에서는 잘 기억도 안나는 마적단 두목으로 나왔다고 한다. (와호장룡 분명 봤는데 장첸이 기억이 안남;;)
여튼 이 영화를 통해 새삼 모호한; 장첸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역시 캐릭터의 힘은 참 강하다 ㅎ)



- 여성이 활약하는 삼국지? 
누군가 이 영화를 그렇게 평한 사람도 있던데,
아마 영화에서의 소교와 손상향의 활약을 염두에 둔 평인 것 같다. 
확실히 남자들만의 이야기인 삼국지에 (여성은 간간히 미인계 이용할 때만 나오지)
여성들의 스토리를 넣은 것은 참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역시 '남자들의 세계'인 전쟁에서 여성이 활약하기 위해서는
손상향처럼 남장을 하고 남자처럼 굴거나
소교처럼 남편과 백성들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하는 내조의 여왕이어야 하는건가
하는 생각을 하니 조금 씁쓸해졌다는.. 
(전에도 친구랑 잠깐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뭐 딱히 대안을 제시할 순 없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다른 얘기지만, 실컷 싸워놓고
갑작스레 " 이 전쟁에서 승자는 없다" 라며 비통하게 전장의 시체를 둘러보는 
주유의 모습에서 왠지 헐리우드를 겨냥한 듯한 인공적이고도 어설픈 휴머니즘(인 척하기)의
냄새가 났다면 너무 사고가 삐뚤어진건가.
소교와 손상향의 활약도 사실 내겐 조금 그렇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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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eling

映畵, 영상 2009. 7. 4. 18:40


-  이 영화에는 여러가지 공포스러운 요소들이 잔뜩 등장한다. 
유아 연쇄 살인과 유기, 각종 고문과 폭력이 치료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정신병동,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해하고 해치는 경찰, 편집 없는 적나라한 교수형 집행 장면...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나를 공포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 등장했던
'a true story' 라는 짧고 강렬한 자막이었다. 
그 한구절이 없었다면 어찌 감히 고담시티같은 데에서나 일어날 법한 이 말도 안되는 사건을 실화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1920년대라곤 하지만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미국 LA에서..
더 끔찍한 건 그와 같은 야만적 시대의 풍경 속에서 슬그머니 떠올리게 되는 오늘날의 슬픈 대한민국의 모습.
3년 전쯤만 해도 이런 영화, 그 배경이 미국이라는 점에 있어서 좀 충격을 받긴 했겠지만 뭐 그래봤자 다 지난 옛날 일쯤으로 생각하고 맘편히 봤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반면 오늘날의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잘못하다간 진짜 나라가 저 꼴 날 수 있겠다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왜 무려 21세기 민주국가에서 살고 있는 내가 전화도 잘 안터지던 1900년대 꼴로 돌아가게 될까봐 전전긍긍해야하나.
생각해보면 참 그 자체가 공포다. 


- 안젤리나 졸리의 멋진 엄마 연기.
왠지 안젤리나 졸리와 엄마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원래 졸리를 좋아했었지만 이 영화를 보고나니 더 좋아졌다.
세상 어디에 이처럼 용감하고 시크한 엄마가 있을 수 있을까. 
" 먼저 싸움을 걸진 않되 마무리는 내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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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고양이, 똥꼬

信, 순간 2009. 6. 6. 15:18



-  길고냥이 치고는 너무 예쁜 우리 똥꼬.
이름이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똥꼬는 똥꼬 ㅎ
길고냥이답게 코에 묻힌 검댕도
그녀의 미모를 바래게 하지는 못한다.
요즘 친구들이 다 떠나서 조금 쓸쓸해하는 똥꼬.
그래서인지 부쩍 애교가 늘었다.
게다가 여름에 접어들며 미친듯이 털이 빠지기 시작한 똥꼬..
덕분에 맘 먹고 녀석의 애교를 받아주면 온 몸에 녀석의 털이 달라붙어 고생한다는;;;
그래도 난 너를 사랑한다, 비록 너와 놀다 털로 뒤덮이는 한이 있더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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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映畵, 영상 2009. 4. 18. 01:52

야하다는 소릴 많이 들어서 조금 긴장? 하고 봤는데 생각보다 안야했다. (그래서 실망? ㅎ;)
원작 소설에는 뭔가 현재의 결혼 제도에 의문을 던지는 현란하고 의미심장한 대화들이 많이 오간다는데
영화는 전혀~
손예진이 김주혁에게 '나 딴 사람이랑도 결혼할래~' 하고 귀엽게 떼 쓰는 정도?
그래서 현제의 일처일부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는 별로 없었고,
그냥 로맨틱 코미디 보듯이 즐겁게 봤다.
내가 남녀 관계에 있어서 내가 좀 보수적인 경향도 있어서 더 그랬겠지만
그런걸 다 떠나서 여기 나오는 여인네같이 자기 할 꺼 다 하면서 남 전혀 배려 안 해주는 스타일 참 싫어해서
(아마 손예진이 무작정 떼쓰고 화만 내지 말고 김주혁을 좀 더 배려해주고 설득했다면 어느 정도는
손예진에게 공감했을텐데..;;)
점점 말라가면서 끝까지 손예진과 헤어지지 못하는 김주혁이 참 바보같았다..
왜 이 바보같은 남자 둘은 이렇게 제멋대로인 손예진을 떠나지 못하는가?
친구와 나름의 결론을 내보았는데,
손예진이 좀 제멋대로이긴하지만 귀엽고 예쁘고 거기다가 집안일까지 지 혼자 다하는
그야말로 남성의 환타지에나 존재할법한 여인네여서가 아닐런지.
(역시 결국은 손예진이기 때문인걸까..)
여튼 좀 열받으며 보기는 했지만 손예진도 너무 예쁘게 나오고 김주혁은 내가 참 좋아하는 배우고
여러가지로 볼만한 영화였다.

+ 영화평을 슬쩍 보니 이 영화보고 열내는 남성들이 꽤 많더라.
그런데 생각해보면, 주말 연속극마다 널리고 널린게 이런 비슷한 양다리남? 들 이잖아?
내가 본 어느 막장 드라마에서는(조강지처클럽이었던가) 아예 남자가 손예진처럼 대놓고
두집 살림을 하던데..
아마 남자들은 이걸 보면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열불내는 아줌마들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듯 ㅋㅋㅋ
그런면에서 이 영화 참 좋은 영화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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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P. 르박, 유럽의 마녀사냥

詩,글 2009. 4. 18. 00:36

유럽의 마녀 사냥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브라이언 P 외 (소나무, 2003년)
상세보기

'다독 다독' 모임에서 읽은 두 번째 책.
역사서인지라 소설인 저번 책 보다야 훨씬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려웠지만,
마녀사냥이 지식인층의 진짜 신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흥미롭고 신선하다. 다음은 나의 짧은 서평.

1. 중세 말, 근대 초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마녀 사냥에 대한 해석은 그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사회 경제적 구조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 시기에 일어났던 대규모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그 원인으로 꼽는다. 종교개혁에 따른 삐뚤어진 종교적 열성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이 시기가 기후 변화상 소빙기에 해당하는 시기라는 점을 들어서 갑작스런 기후 변화로 인해 일어난 삶의 변화와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감이 마녀 사냥을 낳았다는 신선한(?) 주장도 있다. 르박 교수 역시 본서에서 나름의 마녀 사냥에 대한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그가 마녀 사냥의 직접적 원인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마녀 재판을 가능케 한 사법 제도의 발달과 갖가지 마녀에 대한 믿음의 확립이다. 흔히 전근대의 무지몽매함의 소산처럼 느껴졌던 마녀 사냥이 근대성과 합리성을 대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법 제도와 지식인 계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흥미로웠다.

 2. 지식인 계층이 마녀의 개념을 민중에게 전파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마녀와 마녀술에 대한 저술을 출판함으로써 같은 지식인 계층과 마녀의 개념을 공유하고 설교와 재판 등을 통해 민중들에게 마녀의 개념을 전파했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언론에 해당되는 개념들이 마녀 개념의 확산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언론이란 참 중요한 법. 그런 면에서 현대 사회에서도 힘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이라면 상식을 무시하고 언론을 제 밑에 두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데, 그들의 그러한 열망에 대해서 아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3. 중세의 지식인 계층은 마녀의 존재와 그 위험성을 자각함으로써 자신들의 체제에 엄청난 위협을 느꼈고, 당시의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이 그들의 두려움을 부추겼으며, 이러한 그들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광적인 마녀 사냥이 유럽 세계를 휩쓸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붕괴될까 그토록 염려했던 세계는 그들이 기득권을 쥐고 있는 중세 크리스트교 세계였다. 현대 사회에서도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대략 얼개가 비슷한 마녀 사냥들이 곧잘 벌어지곤 한다. 특히 냉전 시대, 이른 바 1세계와 2세계라고 불리웠던 지역들에서 이러한 일들이 흔히 일어났던 것 같은데, 본서에도 언급되고 있는 미국의 매카시즘,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의 킬링필드, 중국의 문화대혁명 같은 광적인 사태들에서 이러한 마녀 사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분단국가인 한국 역시 이러한 마녀 사냥이 수십 년 동안이나 아주 흔하게 계속되어왔고 최근 다시 부활할 조짐마저 보이는 듯 하다. (친북 좌파, 좌빨, 빨갱이, 촛불 좀비 기타 등등 현 정권을 탈취하고자 하는 음모세력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전엔 자본주의 체제 수호가 그러한 광적인 마녀 사냥의 동력원이었다면 이제는 대한민국 1%의 기득권 수호가 마녀 사냥으로 번져나갈 조짐이 보인다는 것 정도?

4. 저자는 사법 제도나 마녀 개념의 확립에 비하여 중세 말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는 유럽의 마녀 사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민간에서 일어나는 마녀 사냥의 경우, 사회적․경제적 불안이 마녀 사냥에 거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특히 경제적 전망이 불투명한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에서 이러한 일들이 흔히 일어나는 것 같은데 그 중 다소 충격적?이었던 한 사례를 소개한다.

  - 킨샤사의 어린 마녀들 ('슬럼, 지구를 뒤덮다' 中)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인 킨샤사는 전 세계 거대 도시들 중에서 가난하기로 1,2등을 다투는 도시로 이 지역의 공식 경제는 완전히 붕괴했고, 지역을 통제하는 국가 제도마저도 억압장치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히 붕괴한 상태이다. 킨샤사 주민들의 평균 소득은 100달러가 채 안되며 인구의 2/3가 영양실조이고 중산계급이 멸종했다. 성인 5명 중 1명이 HIV 양성이나 주민의 3/4가 진료 받을 돈이 없어 오순절파 기독교의 주술 치료나 토착 마술에 의존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킨샤사 빈민들의 자녀들은 마녀로 변해가고 있다.
 
그들에게 닥친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재난은 가정의 위기를 불러왔고, 도시 빈민 가정은 식구들 중에서 가장 의존적인 성원들을 버려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결과, ‘해리포터’를 신봉하는 도착적 신앙이 킨샤사를 강타하면서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아이들이 ‘마녀’로 고발당했다. 그야말로 집단 히스테리였다. 마녀로 몰린 아이들은 거리로 쫓겨났고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은 온갖 악행을 저지른 마녀로 지목되는데, 그중에는 겨우 갓난아이를 면한 아이들도 포함된다. 니질리 슬럼 주민들은 마녀 아이들이 밤마다 빗자루를 타고 떼를 지어 날아다닌다고 믿고 있다. 구호 활동가들은 이것이 최근의 현상임을 강조한다. “1990년 전까지는 한번도 킨샤사에서 어린 마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바가 없었다. 지금 마녀로 지목되는 아이들은 부모가 더 이상 먹여살릴 수 없는 짐스러운 존재다. ‘마녀’로 찍힌 아이들은 대부분 극빈 가정의 아이들이다”
 
은사주의 교회들은 이러한 어린 아이들의 마녀화를 더욱 더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17세기 세일럼에서 귀신들린 처녀들이 그랬듯이, 어린 마녀들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는 죄목을 환각의 형태로 경험하는 듯하다. 가족의 비참함과 도시의 아노미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는 희생제물의 역할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 남자아이는 사진사 빈선 베크만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사람들 800명을 잡아먹었어요. 비행기 사고랑 자동차 사고가 나게 해서 죽였어요. 인어를 따라서 벨기에에 갔었어요. 인어 등에 올라타고 앤트워프까지 갔었어요.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닐 때도 있고 아보카도 껍질을 타고 날아다닐 때도 있어요. 밤이면 나는 30살이 되고 아이가 100명이 돼요. 아버지는 기술자였는데 나 때문에 직장을 잃었어요. 그래서 인어랑 같이 아버지를 죽였어요. 또 형이랑 누나를 죽였어요. 그리고 산 채로 묻었어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동생들도 내가 다 죽였어요.”
 
베크만의 주장에 따르면, 마녀로 고발된 아이들을 집에서 쫓아내는 것은 아동유기를 합리화하는 좋은 핑계일 뿐 아니라 “아이들을 일종의 국제 NGO가 운영하는 센터나 종교 마을에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종교 마을에 들어간 아이들은 모종의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끼니를 거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린 마녀들, 특히 병든 아이나 HIV 양성 환자 아이들은 도시군에 징집되어 거리에서 최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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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새의 선물

詩,글 2009. 3. 26. 19:56

새의 선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은희경 (문학동네,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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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다독' 첫 모임에서 읽게 된 책. 대략 모임에 제출?하려고 wbc를 보며 급하게 적은 나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 글을 발표하고, 한참이나 장황하게 소감을 덧붙여 설명한 이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대략의 나의 감상이 전달되었다는..
그러니까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새삼 깨달았다. 훌륭한 작가는 정말로 위대하구나.  

=>  12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조숙한 ‘진희’의 성장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우선 무척 재미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친근하고도 현실감 있는 인물들과 이들이 이끌어가는 -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법한 -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이 좋았다. 특히 어린 나이에도 너무나 조숙한 진희와 대비되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즉 나이는 많지만 너무나 철이 없고 사랑스러운 막내딸인 이모의 캐릭터라든지 별 비중 없이 등장하긴 하지만 철없는 이모에 대한 충성스러운 순정을 보여주는 홍기웅, 무능하고 소시민적인 일상을 살아가다가 죽음으로써 비로소 그 존재를 주위에 각인시키는 이 선생님, 남편의 일상적인 폭력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운명’이라는 믿음 하나로 ‘뒤웅박 팔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광진 테라 아줌마 등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면에서 내게 이 소설에서 가장 일상적이지도 친숙하지도 못하게 느껴졌던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이자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체라 할 수 있는 진희였다. ‘진희의 특유의 세상을 비웃는 듯한 차가운 시선이 다른 긍정적인 인물들이나 에피소드들과 균형을 이루어 이 작품을 단순한 세태 소설 이상으로 만들어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범상한 이여서 그런지; 성이든 사랑이든 죽음이든 모든 것이 다 우연적이고 허무한 것이라는 진희의 결론을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거부감이 들었다. 이런 것이 진정한 성숙이라면 차라리 나는 성숙하지 않은 채로 살고 싶다. 세상에 대한 신비감을 모두 버리고 냉소적인 태도로 삶에 임하는 것이 성숙이라면 진희 스스로도 말하고 있듯이, 성숙한 이에게 세상은 참 재미없는 것이 될 것만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희의 이러한 냉소적인 모습이 분명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른바 ‘어른’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진희가 작위라고 명명했던 ‘보여지는 나’와 ‘진짜 나’를 분리하는 행위라든지, 스스로의 기대와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 느끼는 절망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애초에 기대나 희망과 같은 감정을 갖지 않는다던지 하는 것들이 그렇다. 실제로 나 역시 삶에서 커다란 상처를 받을 때마다 그러한 결심을 품곤 했었다. 그런 면에서 진희가 말하는 성숙이란 진정한 성숙이라기보다는 삶의 상처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 같다. 작가도 에필로그에서 말했듯이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이 이어진다.’ 하지만 단지 삶의 상처를 ‘덮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치유’를 꿈꿀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러한 꿈을 꾸는 것으로 보아 진희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아직 ‘어린애’ 일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진희가 말하는 ‘성숙’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엔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이 너무나 재미없게 느껴져서 삶에 대한 의지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좀 더 방황하고 삶을 믿고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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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개밥바라기별

詩,글 2009. 2. 25. 23:00



나는 언제부터인가 소설을 잘 읽지않게 되었는데
아마 역사를 공부하면서 허구보다는 날 것의 사실들에 더 익숙해지면서부터 인 것 같다.
최근에 다시 소설을 꺼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멀게만 느껴지는 '역사적'사실들에 치일대로 치여서
그 차가움에서 어디론가 멀리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특히 우리 자신이 속해있는 대다수 民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최근인가 우리과의 한 교수님도
'역사는 인간 사회의 일들 중에서도 뭔가 주목할 만하고 중요한 것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지,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라는 기막힌 이야기를 하셨으니까.(동의하는 건 절대 아니다-_-)
그런 면에서 여러가지로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우리의 삶은 역사에 있어선 참 슬픈 것이다.
하지만 문학은 역사와는 달라서,
역사처럼 뭔가 주목할 만하고 중요한 사람들이나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소소하고 평범한 사람들과 사건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비록 가공된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그들을 공감하고 어루만지고 위안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은 내게 그와 같은 문학의 따스함을 여지없이 보여준 작품이다.

지금은 이렇게 더 없이 평범해져버린 내게도
소설의 준처럼 유난스럽게 격정적이었던 청소년기가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준만큼 똑똑하고 용기있었더라면 아마 그처럼 결단력있게 제도권을 박차고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을 때 따라붙게 될 세상의 수 많은 선입견들과 꼬리표들을 미처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나약했고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그 실체조차 뚜렷이 파악치 못한 나는
그럭저럭 폭력적인 제도권 교육을 살아내고 또 다른 제도권 교육 속으로 편입되었다.
대학에 다니며 한 동안 나의 그와 같은 역사를 잊고 살았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잊으려고 애써 노력했던 것 같다. 
가까스로 기존의 궤도로 돌아온 내게 있어서 고등학교 시절의 내 모습은 어리석은 패배자의 모습으로서
앞으로 전진해나가기 위해서는 잊지 않으면 안 될 상처처럼 느껴졌다.
그 시절로부터 단절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잊은 것처럼 그 시절을 마주보지 않고 살면, 정말로 마치 타자바라보듯이 그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4년을 뭣에 휩쓸리듯 살아내고 다시 미래를 준비해야만 하는 시기가 와서야 
나는 비로소 그 때의 내 모습 -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현재에 대한 불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적 휩쓸림으로 가득 찬 -이 잊으려는 스스로의 의식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스란히 내 안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개밥바라기 별을 통하여 이러한 나의 불안이 실은 실존하는 인간으로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어쩌면 평생을 안고가야하는 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준은 그로 인해 학교라는 제도권으로부터 뛰쳐나왔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방황했고 마치 자신을 내던지듯이
베트남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신처럼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인간은 본디 그런 것이다.
하지만 작가 황석영이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아붙였던 모든 불안들을 딛고 작가로서 스스로를 완성시킬 수 있었듯이 인간은 또한 그 불안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까 나도 너무 지난 시절의 내 모습을, 그리고 오늘날의 내 모습을 비난하지 말자. 그리고 그 불안을 통해 어제보다 오늘 더 성숙해졌음을 믿으며, 나의 불안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자. 
나중에 내가 황석영 작가만큼 나이를 먹었을 때, 그처럼 나도 나의 지난 삶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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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치마(The Black Skirts)

音樂, 멜로디 2009. 2. 25. 21:43


오랜만에 엄청 좋은 음반을 들었는데, 바로 검정치마의 '201'이다.
아니나다를까 나름 꽤 인디에서는 알아주는 밴드인듯.
검색해보니 관련 글이 예상보다 꽤 많다.
사실 처음 들을 때는 정체불명의 음반이라고 생각했는데,
펑크부터 락앤롤부터 뉴웨이브 스런 곡들부터
꽤 잡다한? 음악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저기 저 표지도 정체불명. 201이라는 앨범명은 또 뭔지 -_-)
게다가 한 곡에서조차 별로 일관성이란 게 없다.
느린 리듬과 빠른 리듬, 메이저와 마이너를 넘나드는데다
심지어는 가사까지 영어였다가 한국어였다가 에스파냐어?(맞나)로 추정되는
언어가 나왔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다.
가사는 또 어찌나 직설적인지
착한 생각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여튼 이처럼 잡탕밥스러운 앨범이지만
놀랍게도 전혀 산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자유분방함이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그 비결은 역시 밴드의 내공이겠지만
그중에서도 보컬이자 검정치마의 중심?이라할 수 있는 
싱어송라이터 조휴일의 내공은 만만치 않아보인다.
전혀 다른 느낌의 리듬과 멜로디들을 능수능란하게 바느질하는 그의 내공은
사실 좀 대단한 것 같다.
어디서 봤는데, 검정치마의 이 1집을 델리스파이스의 1집에 견주는 글까지 있었다.
(물론 음악성면에서가 아니라 한국 인디 음악의 어떤 전환점이라고 해야하나, 뭐 그런 면에서)
그렇게까지 대단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튼 검정치마의 이번 앨범은
확실히 최근 들은 앨범들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고 재미있는 앨범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가장 귀에 꽂히는 노래는 역시 좋은만큼 가장 유명한 '좋아해줘'와 'antifreeze'이다.
락앤롤을 재치있게 해석한 'stand still'도  재미있는 곡이다.
 



첨부한 노래는 antifreeze, 멜로디도 멜로디지만 가사가 상당히 좋다~

우린 오래 전부터 어쩔 수 없는 거였어
우주 속을 홀로 떠돌며 많이 외로워하다가
어느 순간 해와 달이 겹치게 될 때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거야

하늘에선 비만 내렸어 뼛 속까지 다 젖었어
얼마있다 비가 그쳤어 대신 눈이 내리더니
영화서도 볼 수 없던 눈보라가 일 때
너는 내가 처음 봤던 눈동자야

낯익은 거리들이 거울처럼 반짝여도
니가 건네주는 커피 위에 살얼음이 떠도

우리들은 얼어붙지 않을거야
바다속의 모래까지 녹일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

숨이 막힐 것 같이 차가왔던 공기 속에
너의 체온이 내게 스며들어 오고 있어

우리들은 얼어붙지 않을거야
바다속의 모래까지 녹일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

너와 나의 세대가 마지막이면 어떡해
또 다른 빙하기가 찾아오면은 어떡해

긴 세월을 변하지 않은 그런 사랑은 없겠지만
그 사랑을 기다려줄 그런 사람을 찾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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