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대통령 서거에 대한 단상

信, 순간 2009. 8. 25. 19:34

 


- 8월 18일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이후부터 공부가 도통 손에 잡히지 않아
고시생 신분임에도 과감히(?) 하루를 버리고 23일, 국회의사당과 서울광장에 다녀왔다.
나는 사실 DJ의 시대를 살았던 연배도 아니고,
호남 출신도 아니며,
그를 특별히 지지했던 편도 아니었지만,
게다가 노무현 전대통령 때와는 달리 그의 서거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거 소식을 접하는 순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동요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때보다도 더욱 그랬다. 
아마도 첫 번째로는 노무현에 이어 김대중이라는 민주개혁성향 지도자마저 잃었다는,
MB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진보적 한국인들이 느끼는 비슷한 상실감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로는 나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그야말로 온 몸으로 온전히 살아냈던 거인의 죽음에서
한국 현대사의 한 장이 막을 내리는 순간을 보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좀 더 곰곰히 생각해보자면, 후자 쪽의 감정이 더 큰 것 같다.
24년이란 그닥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으로(운 좋게도?) 한 장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을 보았다.
어느 정도 감정의 과잉과 비약이 섞인 다분히 주관적 견해이긴 하지만
한 동안 그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그 끝은 말 그대로의 '단절'을 의미하는 끝은 아니다. 
그가 죽었다고, 풍파 많은 한국 현대사가 함께 끝나버렸다는 그런 감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정치적, 사상적 유산들도 (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남아 다가오는 역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라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 온
하나의 거대한 시대정신은 일단의 막을 내렸다.
그것은 일제시대와 해방 공간을 거쳐 오늘날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져 온 
식민지 경험과 분단이라는 한국 사회의 특수한 조건이 만들어낸 한국 사회만의 
독특하고도 거대한 사류였다. 
개발독재와 그의 유지를 위한 반통일적 반공정책과 맞서 싸움으로써 한국 사회에 희망을 주었고,
6월 항쟁과 평화적인 정권교체, 남북회담을 이루어내며 어느 정도 결실도 맺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록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있게한 위대한 과거의 정신일런지는 몰라도
미래의 정신은 되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진보를 말하는 이들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보다 더 큰 가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록 MB 시대를 거치며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거꾸로 MB 시대의 부활을 막지 못한 것이 앞서 말한 시대정신의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과거의 정신이 되었다고 해서 그 시대적 가치를 평가절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기에
여운형, 조봉암, 김구, 장준하, 문익환 과 같은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그 정신을 지키다 죽어갔다.
그리고 DJ는 그러한 시대정신을 끝까지 지키다 죽어간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   

그러한 인물의 마지막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보낼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을 느꼈다.
노무현은 엄밀히 말하지면  그 시대의 정신보다는 '우리' 시대의 정신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가 내세웠던 지역주의 타파, 소통과 참여, 반권위주의는 DJ 시대의 가치라기보다는
포스트 DJ 시대의 가치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그의 죽음을 접했을 땐, '우리편'을 비열하게 뺏긴듯한 상실감과 분노에, 그리고 '우리편'을 
끝까지 보호해주지 못한 미안함에 눈물을 흘렸다. 다시는 그렇게 어이없이 '우리편'을 잃지말자는
다짐도 있었다. 
그에 비해 김대중 전대통령의 죽음은 한 시대를 이제는 정말 역사 속으로 보낸다는
감회와 아쉬움, 쓸쓸함이 좀 더 크다. 
그 시대를 피하지 않고 온전히 살아준 고인에 대한 깊은 존경과 
그의 큰 공헌으로 이루어낸 민주 사회를
그와는 달리 온전히 지켜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 대한 씁쓸한 반성이 교차한다.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는지 김대중 전대통령의 추모 풍경은 
겨우 석달 전인 노무현 대통령 때와는 많이 달랐다.
석달 전, 사람들은 거리에서 분노하고 있었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민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촛불을 들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와 같은 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담담히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잔디밭에 앉아 파란만장했던 고인의 생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그와 김정일 위원장이 포옹하는 그 역사적 장면을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이가 지긋하신 노신사들은 착찹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 문 채
그의 영결식 소식을 전하는 호외 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이 장면은 왠지 몰라도 나를 무척 슬프게 만들었다.)
노 대통령 때처럼 광장에는 커다란 흐느낌도, 분노의 구호도, 엄청난 인파도 없었지만
묘한 엄숙함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거대한 시대의 물결을 역사 속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광주와 금남로, 6월 항쟁, 민주주의, 통일 과 같은 것들이
그와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게 될까봐 두렵다.
얼마 전까진 촌스럽고 낡은 거대담론으로서 그저 넘어서야 할 것들로만 치부해버리기도 했었지만,
그와 같은, 이제는 낡은 것처럼 보이는 가치들을 위해서도 수많은 이들의 피와 희생이 있었고
그랬기에 지금의 우리도 이렇게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대부분 포스트 모던의 시대를 살아온 내가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인물인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리 없다.
이전에 비해서는 획기적인 친서민적 지도자였으나 시대적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에게서 솔솔 풍기던 권위주의적 냄새와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킴으로써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잉태시킨 그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
호남권과 영남권으로 대변되어 온 그의 시대의 골 깊은 지역주의 정치는
때론 그 역시 그저 그런 정치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죽음의 힘은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구나.
그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한국 사회와 역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자리가 이렇게나 큰 것이었음을
절감한다. 
진심으로 끝까지 가치를 배반하지 않고 사회를 위하여 헌신했던 '선생님'의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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