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P. 르박, 유럽의 마녀사냥

詩,글 2009. 4. 18. 00:36

유럽의 마녀 사냥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브라이언 P 외 (소나무,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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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 다독' 모임에서 읽은 두 번째 책.
역사서인지라 소설인 저번 책 보다야 훨씬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려웠지만,
마녀사냥이 지식인층의 진짜 신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흥미롭고 신선하다. 다음은 나의 짧은 서평.

1. 중세 말, 근대 초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마녀 사냥에 대한 해석은 그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사회 경제적 구조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 시기에 일어났던 대규모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그 원인으로 꼽는다. 종교개혁에 따른 삐뚤어진 종교적 열성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이 시기가 기후 변화상 소빙기에 해당하는 시기라는 점을 들어서 갑작스런 기후 변화로 인해 일어난 삶의 변화와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감이 마녀 사냥을 낳았다는 신선한(?) 주장도 있다. 르박 교수 역시 본서에서 나름의 마녀 사냥에 대한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그가 마녀 사냥의 직접적 원인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마녀 재판을 가능케 한 사법 제도의 발달과 갖가지 마녀에 대한 믿음의 확립이다. 흔히 전근대의 무지몽매함의 소산처럼 느껴졌던 마녀 사냥이 근대성과 합리성을 대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법 제도와 지식인 계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흥미로웠다.

 2. 지식인 계층이 마녀의 개념을 민중에게 전파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마녀와 마녀술에 대한 저술을 출판함으로써 같은 지식인 계층과 마녀의 개념을 공유하고 설교와 재판 등을 통해 민중들에게 마녀의 개념을 전파했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언론에 해당되는 개념들이 마녀 개념의 확산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언론이란 참 중요한 법. 그런 면에서 현대 사회에서도 힘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이라면 상식을 무시하고 언론을 제 밑에 두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데, 그들의 그러한 열망에 대해서 아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3. 중세의 지식인 계층은 마녀의 존재와 그 위험성을 자각함으로써 자신들의 체제에 엄청난 위협을 느꼈고, 당시의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이 그들의 두려움을 부추겼으며, 이러한 그들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광적인 마녀 사냥이 유럽 세계를 휩쓸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붕괴될까 그토록 염려했던 세계는 그들이 기득권을 쥐고 있는 중세 크리스트교 세계였다. 현대 사회에서도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대략 얼개가 비슷한 마녀 사냥들이 곧잘 벌어지곤 한다. 특히 냉전 시대, 이른 바 1세계와 2세계라고 불리웠던 지역들에서 이러한 일들이 흔히 일어났던 것 같은데, 본서에도 언급되고 있는 미국의 매카시즘,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의 킬링필드, 중국의 문화대혁명 같은 광적인 사태들에서 이러한 마녀 사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분단국가인 한국 역시 이러한 마녀 사냥이 수십 년 동안이나 아주 흔하게 계속되어왔고 최근 다시 부활할 조짐마저 보이는 듯 하다. (친북 좌파, 좌빨, 빨갱이, 촛불 좀비 기타 등등 현 정권을 탈취하고자 하는 음모세력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전엔 자본주의 체제 수호가 그러한 광적인 마녀 사냥의 동력원이었다면 이제는 대한민국 1%의 기득권 수호가 마녀 사냥으로 번져나갈 조짐이 보인다는 것 정도?

4. 저자는 사법 제도나 마녀 개념의 확립에 비하여 중세 말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는 유럽의 마녀 사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민간에서 일어나는 마녀 사냥의 경우, 사회적․경제적 불안이 마녀 사냥에 거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특히 경제적 전망이 불투명한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에서 이러한 일들이 흔히 일어나는 것 같은데 그 중 다소 충격적?이었던 한 사례를 소개한다.

  - 킨샤사의 어린 마녀들 ('슬럼, 지구를 뒤덮다' 中)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인 킨샤사는 전 세계 거대 도시들 중에서 가난하기로 1,2등을 다투는 도시로 이 지역의 공식 경제는 완전히 붕괴했고, 지역을 통제하는 국가 제도마저도 억압장치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히 붕괴한 상태이다. 킨샤사 주민들의 평균 소득은 100달러가 채 안되며 인구의 2/3가 영양실조이고 중산계급이 멸종했다. 성인 5명 중 1명이 HIV 양성이나 주민의 3/4가 진료 받을 돈이 없어 오순절파 기독교의 주술 치료나 토착 마술에 의존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킨샤사 빈민들의 자녀들은 마녀로 변해가고 있다.
 
그들에게 닥친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재난은 가정의 위기를 불러왔고, 도시 빈민 가정은 식구들 중에서 가장 의존적인 성원들을 버려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결과, ‘해리포터’를 신봉하는 도착적 신앙이 킨샤사를 강타하면서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아이들이 ‘마녀’로 고발당했다. 그야말로 집단 히스테리였다. 마녀로 몰린 아이들은 거리로 쫓겨났고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은 온갖 악행을 저지른 마녀로 지목되는데, 그중에는 겨우 갓난아이를 면한 아이들도 포함된다. 니질리 슬럼 주민들은 마녀 아이들이 밤마다 빗자루를 타고 떼를 지어 날아다닌다고 믿고 있다. 구호 활동가들은 이것이 최근의 현상임을 강조한다. “1990년 전까지는 한번도 킨샤사에서 어린 마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바가 없었다. 지금 마녀로 지목되는 아이들은 부모가 더 이상 먹여살릴 수 없는 짐스러운 존재다. ‘마녀’로 찍힌 아이들은 대부분 극빈 가정의 아이들이다”
 
은사주의 교회들은 이러한 어린 아이들의 마녀화를 더욱 더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17세기 세일럼에서 귀신들린 처녀들이 그랬듯이, 어린 마녀들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는 죄목을 환각의 형태로 경험하는 듯하다. 가족의 비참함과 도시의 아노미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는 희생제물의 역할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 남자아이는 사진사 빈선 베크만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사람들 800명을 잡아먹었어요. 비행기 사고랑 자동차 사고가 나게 해서 죽였어요. 인어를 따라서 벨기에에 갔었어요. 인어 등에 올라타고 앤트워프까지 갔었어요.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닐 때도 있고 아보카도 껍질을 타고 날아다닐 때도 있어요. 밤이면 나는 30살이 되고 아이가 100명이 돼요. 아버지는 기술자였는데 나 때문에 직장을 잃었어요. 그래서 인어랑 같이 아버지를 죽였어요. 또 형이랑 누나를 죽였어요. 그리고 산 채로 묻었어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동생들도 내가 다 죽였어요.”
 
베크만의 주장에 따르면, 마녀로 고발된 아이들을 집에서 쫓아내는 것은 아동유기를 합리화하는 좋은 핑계일 뿐 아니라 “아이들을 일종의 국제 NGO가 운영하는 센터나 종교 마을에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종교 마을에 들어간 아이들은 모종의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끼니를 거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린 마녀들, 특히 병든 아이나 HIV 양성 환자 아이들은 도시군에 징집되어 거리에서 최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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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새의 선물

詩,글 2009. 3. 26. 19:56

새의 선물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은희경 (문학동네,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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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다독' 첫 모임에서 읽게 된 책. 대략 모임에 제출?하려고 wbc를 보며 급하게 적은 나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 글을 발표하고, 한참이나 장황하게 소감을 덧붙여 설명한 이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대략의 나의 감상이 전달되었다는..
그러니까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새삼 깨달았다. 훌륭한 작가는 정말로 위대하구나.  

=>  12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조숙한 ‘진희’의 성장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우선 무척 재미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친근하고도 현실감 있는 인물들과 이들이 이끌어가는 -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법한 -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이 좋았다. 특히 어린 나이에도 너무나 조숙한 진희와 대비되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즉 나이는 많지만 너무나 철이 없고 사랑스러운 막내딸인 이모의 캐릭터라든지 별 비중 없이 등장하긴 하지만 철없는 이모에 대한 충성스러운 순정을 보여주는 홍기웅, 무능하고 소시민적인 일상을 살아가다가 죽음으로써 비로소 그 존재를 주위에 각인시키는 이 선생님, 남편의 일상적인 폭력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운명’이라는 믿음 하나로 ‘뒤웅박 팔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광진 테라 아줌마 등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면에서 내게 이 소설에서 가장 일상적이지도 친숙하지도 못하게 느껴졌던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이자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체라 할 수 있는 진희였다. ‘진희의 특유의 세상을 비웃는 듯한 차가운 시선이 다른 긍정적인 인물들이나 에피소드들과 균형을 이루어 이 작품을 단순한 세태 소설 이상으로 만들어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범상한 이여서 그런지; 성이든 사랑이든 죽음이든 모든 것이 다 우연적이고 허무한 것이라는 진희의 결론을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거부감이 들었다. 이런 것이 진정한 성숙이라면 차라리 나는 성숙하지 않은 채로 살고 싶다. 세상에 대한 신비감을 모두 버리고 냉소적인 태도로 삶에 임하는 것이 성숙이라면 진희 스스로도 말하고 있듯이, 성숙한 이에게 세상은 참 재미없는 것이 될 것만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희의 이러한 냉소적인 모습이 분명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른바 ‘어른’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진희가 작위라고 명명했던 ‘보여지는 나’와 ‘진짜 나’를 분리하는 행위라든지, 스스로의 기대와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 느끼는 절망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애초에 기대나 희망과 같은 감정을 갖지 않는다던지 하는 것들이 그렇다. 실제로 나 역시 삶에서 커다란 상처를 받을 때마다 그러한 결심을 품곤 했었다. 그런 면에서 진희가 말하는 성숙이란 진정한 성숙이라기보다는 삶의 상처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 같다. 작가도 에필로그에서 말했듯이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이 이어진다.’ 하지만 단지 삶의 상처를 ‘덮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치유’를 꿈꿀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러한 꿈을 꾸는 것으로 보아 진희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아직 ‘어린애’ 일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진희가 말하는 ‘성숙’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엔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이 너무나 재미없게 느껴져서 삶에 대한 의지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좀 더 방황하고 삶을 믿고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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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개밥바라기별

詩,글 2009. 2. 25. 23:00



나는 언제부터인가 소설을 잘 읽지않게 되었는데
아마 역사를 공부하면서 허구보다는 날 것의 사실들에 더 익숙해지면서부터 인 것 같다.
최근에 다시 소설을 꺼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멀게만 느껴지는 '역사적'사실들에 치일대로 치여서
그 차가움에서 어디론가 멀리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특히 우리 자신이 속해있는 대다수 民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최근인가 우리과의 한 교수님도
'역사는 인간 사회의 일들 중에서도 뭔가 주목할 만하고 중요한 것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지,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라는 기막힌 이야기를 하셨으니까.(동의하는 건 절대 아니다-_-)
그런 면에서 여러가지로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우리의 삶은 역사에 있어선 참 슬픈 것이다.
하지만 문학은 역사와는 달라서,
역사처럼 뭔가 주목할 만하고 중요한 사람들이나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소소하고 평범한 사람들과 사건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비록 가공된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그들을 공감하고 어루만지고 위안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은 내게 그와 같은 문학의 따스함을 여지없이 보여준 작품이다.

지금은 이렇게 더 없이 평범해져버린 내게도
소설의 준처럼 유난스럽게 격정적이었던 청소년기가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준만큼 똑똑하고 용기있었더라면 아마 그처럼 결단력있게 제도권을 박차고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을 때 따라붙게 될 세상의 수 많은 선입견들과 꼬리표들을 미처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나약했고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그 실체조차 뚜렷이 파악치 못한 나는
그럭저럭 폭력적인 제도권 교육을 살아내고 또 다른 제도권 교육 속으로 편입되었다.
대학에 다니며 한 동안 나의 그와 같은 역사를 잊고 살았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잊으려고 애써 노력했던 것 같다. 
가까스로 기존의 궤도로 돌아온 내게 있어서 고등학교 시절의 내 모습은 어리석은 패배자의 모습으로서
앞으로 전진해나가기 위해서는 잊지 않으면 안 될 상처처럼 느껴졌다.
그 시절로부터 단절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잊은 것처럼 그 시절을 마주보지 않고 살면, 정말로 마치 타자바라보듯이 그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없이 4년을 뭣에 휩쓸리듯 살아내고 다시 미래를 준비해야만 하는 시기가 와서야 
나는 비로소 그 때의 내 모습 -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현재에 대한 불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적 휩쓸림으로 가득 찬 -이 잊으려는 스스로의 의식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스란히 내 안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개밥바라기 별을 통하여 이러한 나의 불안이 실은 실존하는 인간으로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어쩌면 평생을 안고가야하는 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준은 그로 인해 학교라는 제도권으로부터 뛰쳐나왔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방황했고 마치 자신을 내던지듯이
베트남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신처럼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인간은 본디 그런 것이다.
하지만 작가 황석영이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아붙였던 모든 불안들을 딛고 작가로서 스스로를 완성시킬 수 있었듯이 인간은 또한 그 불안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까 나도 너무 지난 시절의 내 모습을, 그리고 오늘날의 내 모습을 비난하지 말자. 그리고 그 불안을 통해 어제보다 오늘 더 성숙해졌음을 믿으며, 나의 불안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자. 
나중에 내가 황석영 작가만큼 나이를 먹었을 때, 그처럼 나도 나의 지난 삶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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