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 포시

映畵, 영상 2009. 10. 18. 00:45





- 요즘 꽂힌? 프랑스 여배우, 클레멘스 포시.
<해리포터와 불의 잔>에서 플뢰르 델라쿠르로 출현했던..
원래 타고난 아름다움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 아름다움을 꾸밈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알아서 매력있는 아가씨이다.
그야말로 프랑스의 여인다운 느낌!!







야상점퍼, 청바지에 금색 힐 ㅋㅋ 이런 아무런 신경안쓴듯한 무심한 패션이 너무 좋다는 ^^;;;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하고 각진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고집이 센 듯한 인상인데,
웃으면 이렇게 토끼같이 귀여워지는 게 또 이 여인의 매력 ㅋㅋ


해리포터 출연진들과..
홀로 파리지앵의 느낌 마구 날려주시는 클레멘스양 ㅎ

역시 사람은 키크고 마르고 하얘야하는건가 -_-;;;;;;;;;!!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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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대통령 서거에 대한 단상

信, 순간 2009. 8. 25. 19:34

 


- 8월 18일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이후부터 공부가 도통 손에 잡히지 않아
고시생 신분임에도 과감히(?) 하루를 버리고 23일, 국회의사당과 서울광장에 다녀왔다.
나는 사실 DJ의 시대를 살았던 연배도 아니고,
호남 출신도 아니며,
그를 특별히 지지했던 편도 아니었지만,
게다가 노무현 전대통령 때와는 달리 그의 서거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거 소식을 접하는 순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동요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때보다도 더욱 그랬다. 
아마도 첫 번째로는 노무현에 이어 김대중이라는 민주개혁성향 지도자마저 잃었다는,
MB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진보적 한국인들이 느끼는 비슷한 상실감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로는 나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그야말로 온 몸으로 온전히 살아냈던 거인의 죽음에서
한국 현대사의 한 장이 막을 내리는 순간을 보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좀 더 곰곰히 생각해보자면, 후자 쪽의 감정이 더 큰 것 같다.
24년이란 그닥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으로(운 좋게도?) 한 장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을 보았다.
어느 정도 감정의 과잉과 비약이 섞인 다분히 주관적 견해이긴 하지만
한 동안 그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그 끝은 말 그대로의 '단절'을 의미하는 끝은 아니다. 
그가 죽었다고, 풍파 많은 한국 현대사가 함께 끝나버렸다는 그런 감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정치적, 사상적 유산들도 (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남아 다가오는 역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라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 온
하나의 거대한 시대정신은 일단의 막을 내렸다.
그것은 일제시대와 해방 공간을 거쳐 오늘날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져 온 
식민지 경험과 분단이라는 한국 사회의 특수한 조건이 만들어낸 한국 사회만의 
독특하고도 거대한 사류였다. 
개발독재와 그의 유지를 위한 반통일적 반공정책과 맞서 싸움으로써 한국 사회에 희망을 주었고,
6월 항쟁과 평화적인 정권교체, 남북회담을 이루어내며 어느 정도 결실도 맺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록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있게한 위대한 과거의 정신일런지는 몰라도
미래의 정신은 되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진보를 말하는 이들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보다 더 큰 가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록 MB 시대를 거치며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거꾸로 MB 시대의 부활을 막지 못한 것이 앞서 말한 시대정신의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과거의 정신이 되었다고 해서 그 시대적 가치를 평가절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기에
여운형, 조봉암, 김구, 장준하, 문익환 과 같은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그 정신을 지키다 죽어갔다.
그리고 DJ는 그러한 시대정신을 끝까지 지키다 죽어간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   

그러한 인물의 마지막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보낼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을 느꼈다.
노무현은 엄밀히 말하지면  그 시대의 정신보다는 '우리' 시대의 정신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가 내세웠던 지역주의 타파, 소통과 참여, 반권위주의는 DJ 시대의 가치라기보다는
포스트 DJ 시대의 가치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그의 죽음을 접했을 땐, '우리편'을 비열하게 뺏긴듯한 상실감과 분노에, 그리고 '우리편'을 
끝까지 보호해주지 못한 미안함에 눈물을 흘렸다. 다시는 그렇게 어이없이 '우리편'을 잃지말자는
다짐도 있었다. 
그에 비해 김대중 전대통령의 죽음은 한 시대를 이제는 정말 역사 속으로 보낸다는
감회와 아쉬움, 쓸쓸함이 좀 더 크다. 
그 시대를 피하지 않고 온전히 살아준 고인에 대한 깊은 존경과 
그의 큰 공헌으로 이루어낸 민주 사회를
그와는 달리 온전히 지켜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 대한 씁쓸한 반성이 교차한다.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는지 김대중 전대통령의 추모 풍경은 
겨우 석달 전인 노무현 대통령 때와는 많이 달랐다.
석달 전, 사람들은 거리에서 분노하고 있었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민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촛불을 들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와 같은 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담담히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잔디밭에 앉아 파란만장했던 고인의 생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그와 김정일 위원장이 포옹하는 그 역사적 장면을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이가 지긋하신 노신사들은 착찹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 문 채
그의 영결식 소식을 전하는 호외 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이 장면은 왠지 몰라도 나를 무척 슬프게 만들었다.)
노 대통령 때처럼 광장에는 커다란 흐느낌도, 분노의 구호도, 엄청난 인파도 없었지만
묘한 엄숙함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거대한 시대의 물결을 역사 속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광주와 금남로, 6월 항쟁, 민주주의, 통일 과 같은 것들이
그와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게 될까봐 두렵다.
얼마 전까진 촌스럽고 낡은 거대담론으로서 그저 넘어서야 할 것들로만 치부해버리기도 했었지만,
그와 같은, 이제는 낡은 것처럼 보이는 가치들을 위해서도 수많은 이들의 피와 희생이 있었고
그랬기에 지금의 우리도 이렇게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대부분 포스트 모던의 시대를 살아온 내가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인물인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리 없다.
이전에 비해서는 획기적인 친서민적 지도자였으나 시대적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에게서 솔솔 풍기던 권위주의적 냄새와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킴으로써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잉태시킨 그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
호남권과 영남권으로 대변되어 온 그의 시대의 골 깊은 지역주의 정치는
때론 그 역시 그저 그런 정치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죽음의 힘은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구나.
그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한국 사회와 역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자리가 이렇게나 큰 것이었음을
절감한다. 
진심으로 끝까지 가치를 배반하지 않고 사회를 위하여 헌신했던 '선생님'의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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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 2 : 최후의 결전

映畵, 영상 2009. 7. 13. 03:19




-  무려 작년 이맘때쯤 극장에서 1편을 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데, 본인의 게으름으로 이차저차 미루다가
이제서야 적벽 2를 보게 되었다. 
사실 작년에 본 적벽 1에서 다소 실망을 했었기 때문에 2에서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고,
오히려 그래서 나름 즐겁게 볼 수 있었던 듯. 
1편에서 젤 못마땅했었던 건 역시 제갈량의 캐릭터였는데
1편에 비해 2편에서 제갈량의 비중이 줄었고, 또 1편을 봐서 그랬는지 금성무의 어벙한 제갈량도 나름 적응이 된 탓에 1편만큼 제갈량의 캐릭터가 거슬리진 않았다는(오히려 몇몇 장면에선 큰 웃음 주셨다ㅎ)
작년 우연히 보게 된 씨네 21의 인터뷰에 따르면 오우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늘 그랬듯) 
제갈량과 주유 두 사나이간의 찐한 소통을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했었는데
제갈량과 주유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도도 바라볼 수 있다는게 꽤 참신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에서 그려진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와 같은 찐한 소통을 읽어낼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별로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1편에서는 그래도 그나마 화제가 되었던 가야금(거문고?) 연주씬이라도 있었지
2편에서는 그들의 찐한 소통을 표현했다고 할만한 그럴듯한 장면조차 거의 없다. ( 서로 목 내놓으라고 하는 장면이랑 마지막 주유가 제갈량에게 멍멍을 주는 장면 정도?? 이 장면들에서 주유와 제갈량은 거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본 채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 아마 감독은 두 남자의 이신전심 같은 걸 표현하려고 한 의도겠지만 - 오빠가 이걸 보고 ' 이 영화 은근 동성애 코든데'라고 해서 엄청 웃었다 ㅎㅎ;;;)
오히려 오우삼 감독식의 찐한 소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전형적인 관계는
조미와 어떤 이름 모를 배우가 분한 '먹보와 돼지' 였던 것 같다.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결정적으로 서로를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는 것이
꼭 영웅본색의 적룡과 주윤발의 관계같지 않은가? ㅎ
그에 비해 진정 찐한 소통을 보여주어야 할 주유와 제갈량은 그냥 삼국지 스토리 따라가기에도 너무 바쁘시다.
특히 주유가 진짜 너무 엄청 바빠보였는데 나중엔 자기 목숨도 챙겨야지 부인 목숨도 챙겨야지 
아기 목숨도 챙겨야지 불쌍해보일정도..
이미 잘 짜여진, 그리고 대중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맘대로 바꿀 수도 없는 
삼국지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짜다보니 이전처럼 감독의 의도를 맘껏 담아내기에는 좀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
그리고 삼국지의 뒷이야기를 생각해서 그런거겠지만 그 상황에 조조를 놔준다는 건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오빠와 나 둘 다 무심코 " 죽여 이 바보들아!!" 하고 소리질러버렸다는;;

 


- 비중은 작았지만 사실 적벽1, 2 통틀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캐릭터는 손권이었다.
원작에선 배나온 중년 아저씨로 나왔던 것 같은데 여튼 ;;; 
이 영화의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덜 채워진, 그것을 경험을 통해 점차 채워가는 과정을 
차분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라는 면에서 그랬던 것 같다.
양조위나 금성무와는 달리 장첸은 뭔가 딱히 고정된 이미지가 없는 배우다.
2046에서는 여자의 삶을 파멸시키는 나쁜 남자의 역을 맡기도 하고
해피투게더에서는 임자 있는 양조위에게 끌리는 순진한 알바생 역을 맡기도 하고
와호장룡에서는 잘 기억도 안나는 마적단 두목으로 나왔다고 한다. (와호장룡 분명 봤는데 장첸이 기억이 안남;;)
여튼 이 영화를 통해 새삼 모호한; 장첸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역시 캐릭터의 힘은 참 강하다 ㅎ)



- 여성이 활약하는 삼국지? 
누군가 이 영화를 그렇게 평한 사람도 있던데,
아마 영화에서의 소교와 손상향의 활약을 염두에 둔 평인 것 같다. 
확실히 남자들만의 이야기인 삼국지에 (여성은 간간히 미인계 이용할 때만 나오지)
여성들의 스토리를 넣은 것은 참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역시 '남자들의 세계'인 전쟁에서 여성이 활약하기 위해서는
손상향처럼 남장을 하고 남자처럼 굴거나
소교처럼 남편과 백성들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하는 내조의 여왕이어야 하는건가
하는 생각을 하니 조금 씁쓸해졌다는.. 
(전에도 친구랑 잠깐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뭐 딱히 대안을 제시할 순 없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다른 얘기지만, 실컷 싸워놓고
갑작스레 " 이 전쟁에서 승자는 없다" 라며 비통하게 전장의 시체를 둘러보는 
주유의 모습에서 왠지 헐리우드를 겨냥한 듯한 인공적이고도 어설픈 휴머니즘(인 척하기)의
냄새가 났다면 너무 사고가 삐뚤어진건가.
소교와 손상향의 활약도 사실 내겐 조금 그렇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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